[현대불교신문] [사찰국수 기행] 가을 별식 - 혜성 스님의 ‘고구마 빼떼기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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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볕 말린 ‘빼떼기’ 한 입에 담긴 구수함
□ 당신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은 무엇인가요.
□ 열심히 살아온 당신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 음식은?
□ 기억나는 어머니의 그릇이 있습니까.
□ 내가 대접받은 최고의 식사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 손님을 초대하여 혼자 음식을 준비한 경험이 있나요. 그때의 감정은 어땠나요?
□ 사찰음식을 왜 배우고 싶은가요?
이것은 무슨 질문일까?
심리테스트 같기도, 정신 상담을 위한 사전 질의 같기도 하다. 조금만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면 어느 미스터리한 식당에 초대된 특별 손님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두 ‘음식’과 관련되었다는 것. 도무지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이 질문들의 정체는 놀랍게도 한 사찰음식 강의 신청서의 일부분이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는 행위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교차한다. 나와 자연, 온 우주가 맞닿아 만들어 내는 역사가 매일의 밥상 위에서 쓰인다. 그 요동치는 힘을 세상에 전하는 수행자, 혜성 스님을 만났다.
사찰음식으로 전하는 세계
부산광역시, 그 안에 자리한 작은 섬 을숙도. 저 강원도 태백 함백산에서 발원하여 한반도를 가로지르며 힘차게 흘러내린 강줄기는 이곳 낙동강 하류에서 잠시 가쁜 숨을 고른다.
모든 강은 망망대해로 나아가기 직전, 내달리던 제 속도를 줄인다. 그리고 느려진 유속을 틈타 모래와 흙, 제 속에 품었던 온갖 비밀스러운 것들을 내려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에 걸쳐 켜켜이 쌓인 퇴적물은 다시 비옥한 땅이 되고, 숲이 되며, 끝내 뭇 생명을 품고 살아가는 새로운 우주 그 자체가 된다.
을숙도는 그렇게 탄생한 섬. 지금도 매년 11월이면 시베리아에서 돌아오는 수천의 철새들에게 이 작은 섬은 먼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고귀한 고향의 땅이다.
혜성 스님을 만난 곳은 을숙도 생태공원을 마주한 여래정사(부산시 명지동). 도심 속의 수행도량인 이곳에서 혜성 스님은 ‘마음치유 아카데미’의 원장으로, 또 연간 진행되는 사찰음식 강사로 함께 한다.
“사찰음식 교육을 신청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질문지입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사전에 신청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수강생을 선정하지요. 사찰음식의 정신에 공감하는지, 무엇을 배우고 싶고 또 어떤 것을 가르칠 것인지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니까요. 맛있고, 화려한 음식은 요리학원에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찰음식은 더 큰 가치와 의미를 가슴속에 품어야 합니다.”
그렇다. 저 미스터리한 질문의 작성자는 바로 혜성 스님. 이 시대의 소모적인 음식 문화와 절대적으로 대치되는 사찰음식의 세계. 그 세계의 문을 열기 전, 스님은 사람들에게 되묻는다. 당신의 삶, 다가올 미래를 바꿀 준비가 되었느냐고.
마음으로, 지혜로
“아플 때 먹고 싶은 음식이나, 이제는 깨지고 사라져 버린 그릇의 기억조차 저마다의 마음속 이야기를 전합니다. 인간은 몸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정서적인 충족이 되면 몸의 병이 낫기도 하고요. 제가 생각하는 사찰음식의 힘은 그것에 있습니다.”
마음과 음식의 연결고리. 흔히 들어 봄 직한 이야기지만 혜성 스님의 고민은 그만한 배경을 지닌다. 1분을 하루처럼 쓰고, 십 년이 하루처럼 흘러간 세월이다. 출가 후 치열했던 공부와 템플스테이 지도법사로, 또 사찰음식을 배우고 가르치며 동분서주한 수십 년의 시간. 그 결과 오롯이 남겨진 스님만의 교육 방식을 현장에서 실현 중인 셈이다.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으로 학위를 받은 뒤, 사람들에게 조금 더 실질적인 도움을 줄 방법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외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지만 그럴 형편이 안됐어요. 대학원도 겨우 다닐 때였으니까요. 대신 템플스테이 소임을 맡은 터라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불교 명상심리학을 연구한 1세대 스님들의 곁에서 연구 활동을 시작했지요. 매달 수많은 설문 자료를 정리해 서울로 보내면서요. 낮에는 소임을, 밤에는 공부하며 정신없이 살았던 시절입니다(웃음).”
기존의 심리치료는 약물에 대한 의존성과 내담자의 경제적 어려움, 또 재발의 확률이 높다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문제의 원인과 치유의 원리를 스스로 적용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길을 부처님의 가르침 안에서 찾을 수 있다면. 스님의 이런 고민은 다양한 프로그램과 커리큘럼을 개발하기 위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나와 가족, 환경적인 문제까지 모든 것은 이어져 있습니다. 우주의 인과 관계를 깨닫고, 재료의 약성을 살린 사찰음식의 지혜가 더해진다면 그보다 좋은 약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을이 담긴 음식
가을, 우주가 허락한 풍요와 결실의 계절이다. 오늘 혜성 스님이 준비한 고구마 빼떼기 죽은 우리네 귀한 농작물이 오롯이 담긴 전통의 먹을거리.
고구마를 생으로 얇게 썰어 가을볕에 말린 빼떼기는 먹을 것이 궁하던 시절, 간식으로 또 식재료로 두루 쓰이던 기특한 구황식품이었다.
“가을에 고구마를 수확하면 스님들이 고구마를 썰어 마루에서 말려요. 예전에는 냉장고가 없으니 이런 것들을 말리면 한지에 곱게 싸서 장독대에 보관을 했어요. 큰스님들이나 귀한 손님이 오시면 상에 올리고, 힘든 대중 울력을 하고 나면 죽을 쑤어서 다 같이 먹기도 하고요.” 출가와 함께 오랜 시간 머물렀던 지리산 대원사에서의 기억, 지금도 생생한 가을의 풍경이다.
스님의 작은 부엌에서 보글보글 끓는 빼떼기 죽의 구수한 내음이 진동한다. 말린 고구마 빼떼기가 쫀득하게 살아나고, 팥과 콩, 차조 등의 잡곡이 입안에서 고소하게 부서지는 때. 그리고 모든 재료가 하나로 어우러질 때까지 뭉근하게, 오래 끓여주어야 제맛이 우러나온다.
넉넉하게 담은 고구마 빼떼기 죽 한 그릇. 손으로 들기 어려울 만큼 뜨끈한 사발의 온기도 이 맛의 일부다. 소금과 설탕을 취향대로 넣고 후후 불어 입에 넣는 순간, 죽 전체에 퍼진 은근한 달콤함과 푹 익은 잡곡의 구수함이 입으로, 아니 온 마음으로 퍼져 나간다.
“고구마 빼떼기 죽은 차갑게 먹으면 달콤함이 더 진해져요. 꼭 팥빙수처럼요. 겨울에 빼떼기 죽을 장독대 위에 올려두면 살얼음이 생기지요. 그때 시원한 동치미와 함께 먹으면 최고의 별식이 됩니다. 구황식품은 어려운 시절 생명을 살린 음식이니, 심신이 허한 날 간식으로 추천합니다. ”
쉬어가는 계절
여름에는 용맹정진에 들어선 스님들의 심신을 안정시키는 상추전을, 겨울에는 지리산의 약초들을 삶아 내린 물로 약성 풍부한 식혜를 담아 수행의 피로를 풀어주던 산사의 지혜. 지리산 대원사에서 지낸 모든 계절마다 만날 수 있었던 풍경이다.
이 땅의 수행자들과 궤를 같이하며 쌓인 그 오랜 지혜에서 혜성 스님은 사찰음식의 미래를 본다.
“그저 철마다 건강한 음식을 찾아 먹는 것만이 사찰음식 교육은 아닙니다. 사찰음식의 약성에 대한 연구와 함께 그 지혜를 학술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부처님의 사상인 자비와 공생의 가르침을 사찰음식 교육을 통해 전할 때, 몸과 마음을 살리는 진정한 방편이 될 거라 믿습니다.”
수십 년간의 모든 소임을 내려놓고 자신과 주변을 돌아본 지 이제 4년. 잠시 쉬어가는 이 계절에도 스님의 꿈은 여전히 갈무리 중이다. 앞만 보고 달리던 저 강물이 더 큰 바다로 나아가기 전 스스로 느려지듯, 제 몸을 가벼이 하고 새로운 우주를 만들 듯이.
▶한줄 요약
말린 고구마 빼떼기가 쫀득하게 살아나고, 팥과 콩, 차조 등의 잡곡이 입안에서 고소하게 부서지는 때. 그리고 모든 재료가 하나로 어우러질 때까지 뭉근하게, 오래 끓여주어야 제맛이 우러나온다.
재료 | 말린 고구마 500g, 강낭콩(홍대) 1/2컵, 팥 1/2컵, 차조 1/2컵, 물
만드는 법 |
① 1. 팥은 씻어서 물을 넣고 한번 끓인 후, 윗물을 따라 내고 다시 물을 부어 물러질 때까지 삶는다.
② 강낭콩도 3시간 정도 불린 후 무르지 않게 삶아 둔다.
③ 고구마 빼떼기와 팥, 강낭콩을 큰 냄비에 넣고 물을 내용물의 3배 정도 넣고 끓인다.
④ 어느 정도 끓으면 씻어서 물기를 뺀 차조를 넣고 모든 재료가 어우러질 때까지 끓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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