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보] “딱 그만큼이면 충분해”… 지친마음에 위안 한 상[덕후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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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업무와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감에 지쳐 과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를 오래 생각했다. 바로 그 시기에 웹툰 ‘세화, 가는 길’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처럼 나타났다.
한혜연 작가의 이 웹툰은 2022년 2월부터 지난 5월까지 카카오웹툰에서 연재된 작품으로, ‘2024년 오늘의 우리만화’에 선정됐다. 상처받은 이들의 이야기를 사찰음식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풀어내며, 치유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작품은 연인을 잃은 세화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점차 다양한 인물들의 서사로 확장된다. 아이돌 연습생 생활 10년 끝에 데뷔하지 못한 보미, 악의적 소문으로 식당을 접은 앤드류 박 등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세화사를 찾아온 이들의 이야기가 108화에 걸쳐 펼쳐진다.
이들을 맞이하는 것은 따뜻한 사찰음식이다. 공양간에서 만들어지는 음식들은 고기도, 오신채도 쓰지 않는 담백한 것들이지만, 계절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봄의 냉이, 여름의 가지, 가을의 도토리, 겨울의 무처럼 제철 식재료로 만든 음식은 자연의 순리를 담고 있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도 수행이다. 재료를 다듬고, 씻고, 조리하는 행위 자체가 구도(求道)가 된다. 이는 세화사 공양간에 걸린 구절로도 드러난다. ‘이 음식들이 어디에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는 받기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이 음식을 받습니다.’ 이처럼 종종 등장하는 법구경의 구절들은 작품 속 주인공들과 그리고 독자들이 가진 문제를 은유적으로 함축함과 동시에,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불교적 통찰을 제공한다.
이 작품이 주는 위안은 특별하다. 극적인 전개나 화려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지친 사람, 화가 난 사람, 다친 사람들의 곁에 다가와 몸을 비비거나 대신 화내주는 작품 속 고양이 보리와 타리처럼 문제 속에 빠져 고립된 내 근처에 어느새 다가와 있을 뿐이다.
‘세화, 가는 길’을 읽는 동안 우리는 마음속에 나만의 작은 공양간을 품게 된다. 24시간 연결된 업무용 메신저 창에서 느끼는 무거움이, 밀려드는 업무에 종종거리던 하루가, 초조하던 마음이 달래진다. 공 보살이 묵묵히 긴 시간 동지팥죽을 휘젓는 것처럼, 동주 스님이 서툰 칼질로도 천천히 버섯을 써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딱 그만큼씩 해나가면 된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 24시간, 딱 그만큼씩만 나도 남들처럼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면 되는 것이다.
전혜정 청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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